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윈스턴 처칠 (문단 편집) == 여담 == 아래의 내용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며, 이 밖에도 그의 흔한 [[영국인]]다운 괴상한 품행과 배짱을 보여주는 기행은 무수히 많다. * 2차 세계대전 도중 처칠은 군부대를 방문하여 [[톰슨 기관단총]]을 들고 [[중절모]]를 쓴 뒤 [[시가(담배)|시가]]를 물고 사진을 찍은 적이 있다. || [[파일:attachment/churchill-met-tommy-gun.jpg|width=100%]] || 지금 보여주는 사진은 현대에는 처칠 하면 떠올리는 전형적인 이미지가 되었지만, 원래 톰슨 기관단총, 시가, 중절모 3종 세트는 금주법 시대 전형적인 미국 [[마피아]]들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이것이 모티브가 된 게 [[리그 오브 레전드]]의 챔피언 [[그레이브즈]]의 스킨인 마피아 그레이브즈이다.] 독일의 선전장관 [[파울 요제프 괴벨스]]는 이를 이용해 이 사진을 마치 현상범 수배지같이 만들어 "처칠은 현상금이 걸린 악질 마피아 두목 같은 놈이다!" 라는 [[선전]]을 대량으로 유포했는데, 막상 영국에서는 "마피아 보스처럼 무자비하게 독일군들을 싹 쓸어버릴 것 같은 카리스마 총리 각하다!", "딱 처칠 총리네요!" 등의 반응을 보이며 선전 효과는 고사하고 되려 영국인들의 사기 증진 효과가 나는 바람에 스스로 선전을 중단했다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기행의 민족다운 기상의 영국인~~ 선전/선동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괴벨스가 실패한 몇 안 되는 사례 중 하나다.[* 사실 영국인들은 저런 식의 패러디를 상당히 즐긴다. 처칠의 얼굴을 [[불독]]에 합성한 전시 포스터까지 정부의 지하벙커에 붙여 놓을 정도였으니... 심지어 영국 시민들은 불독처럼 매우 듬직하다는 이유로 그 포스터를 엄청 좋아했다는 말까지 있다. 불독까지도 합성한 판에 마피아 보스가 대수였겠는가?] 한편으로 이 선전은 오히려 괴벨스가 영국을 [[자만]]하고 방심하게 만들어서 국가 방어에 집중하지 못게 하려는 목적의 선전이었다는 평도 있는데,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괴벨스는 영국의 애국심을 역이용해 허를 찌르려 했던 셈이다. 뭐가 어찌 되었든 괴벨스는 이 사건을 비롯한 여러 선동 사건으로 영국에서의 인식이 크게 나빠져 몇몇건에서는 그의 앙숙이었던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가 대영선전을 대신하기도 했다. 이런 스타일링에 대해 처칠이 강인한 지도자의 이미지를 내려고 일부러 갱처럼 이렇게 차리고 다녔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건 사실과 조금 다르다. 일단 처칠의 유명한 옷차림은 당대에는 '''전형적인 명문가 귀족 신사'''의 차림이었다. 처칠이 자주 썼던 홈보그라는 중절모도 중절모 중 가장 격식있는 모자였고, 그가 입은 검은 조끼와 재킷에 회색 줄무늬 바지도 테일코트 다음가는 격식을 가진 준례복 '블랙라운지' 스타일이었다. 쓰리피스 정장에 모자와 지팡이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해도 될 정도의 전형적 영국 신사 스타일. 그러니까 처칠은 영국에서 가장 유서깊은 가문 중 하나로 수많은 귀족들을 배출한 스펜서-처칠 가문 사람인 만큼 그냥 당대 자기 계층에서 흔한 옷차림을 하고 다녔을 뿐이다.[* 사실 동시대 사람들 중 진짜로 일부러 이미지 형성과 관리를 실천한 사람은 처칠보다는 차라리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연합군]] [[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다. 본래 맥아더도 명문가 출신이어서 고급 파이프를 주로 썼는데, 어느 날 [[더글러스 맥아더#s-6|예비로 쓰던 옥수수 파이프를 피는 사진]]이 유명해지자 기자들 앞에서는 반드시 옥수수 파이프만 썼다.] 그가 추가한 아이템을 굳이 들자면 시가 정도인데, 젊었을 때까진 맛도 못 봤지만 쿠바에 가게 되었을 때 친구들이 '쿠바 하면 시가지' 하는 바람에 한 번 피워 봤다가 너무 맛있어서 계속 피우게 된 거라고. 즉 강인한 갱 이미지가 생긴 건 반쯤은 괴벨스 탓이고, 나머지 반쯤은 그냥 처칠 자신이 너무 강인~~험악~~하게 생겨서다. 애초에 처칠은 갱단 두목처럼 보이는 저 사진을 죽도록 싫어했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손에 술이나 총을 든 모습을 찍히지 않도록 주의하게나. 난 술은 피했는데 그 몹쓸 사진, 손에 기관단총을 들고 있는 모습이 찍힌 사진 때문에 여태까지 곤욕을 치르고 있지. 다른 것도 있지만 그 사진이 나한테 입힌 손해가 커"라고도 말했다고. 영국 내 처칠의 다른 정적들도 문제의 사진을 이용해서 괴벨스가 했던 것과 비슷한 정치적 공세나 비판을 퍼붓기도 했던 모양이다. 하여튼 이 사진 때문에 [[노동당(영국)|노동당]]과 [[소련]]에게는 엄청 까였다고 한다. || [[파일:Churchillsniper.jpg|width=100%]] || 재미있는 건 연합군의 독일 침공이 시작되자 영국군에서는 저 톰슨을 든 처칠 사진에 독일어로 [[저격수]]라고 써서 독일에 유포하였다는 것.[* 당시에 저격수는 얍삽하게 뒤에서 치는 비겁자란 인식이 있었다. 되레 영국 국민들은 저 사진을 보고 했던 말이 '간지난다'였다는....] * 그 외에도 처칠을 대표할 유명한 사진으로는, 윈스턴 처칠 하면 흔히 떠올리는 정색한 표정이 담긴 사진이 있다. || [[파일:external/lh3.googleusercontent.com/Winston%2BChurchill.%2B1941.jpg|width=100%]] || 하필 이런 험상궂은 표정으로 찍힌 것에는 재미있는 사연이 얽혀있는데, [[사진작가]]인 [[유서프 카쉬]][* 처칠과 사진을 찍을 당시에 처칠은 "자네는 사람을 괴롭히는 데에 소질이 있군. 그럼 욕 먹고 오래 못 살 거야." 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카쉬는 보다시피 (한 세대 차이는 있지만) 향년 94세로 처칠보다 더 오래 살았다. --욕 먹어서 오래 산거다--]는 이 사진을 찍으면서 전쟁을 치르며 영국을 이끄는 그의 카리스마를 담아내려 했는데, 처칠이 도무지 입에서 [[시가(담배)|시가]]를 놓지를 않자 참다 못해 처칠이 입에 문 시가를 손으로 쏙 잡아빼 버렸다고 한다. 이에 열받은 처칠은 얼굴을 잔뜩 찌푸렸는데, 바로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셔터에 담아낸 것이 바로 위의 사진이다. || [[파일:external/acurator.com/Karsh_Churchill_Smile.jpg|width=100%]] || 처칠은 사진을 찍은 후 [[갑분싸|잠깐 침묵하다가]] 굳은 표정을 풀면서 한 장 더 찍으라고 했고, 그렇게 웃으면서 찍은 사진이 바로 위의 사진이다. 그리고는 촬영 뒤 카쉬에게 악수를 청하며 "당신은 으르렁거리는 [[사자]]도 가만히 사진 찍게 할 수 있군." 이라고 했다고. 이 때문에 이 사진은 사진사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다뤄지는 사진이 되었다. 처칠도 이 사진을 보고는 마음에 들어했다. 기분이 풀어졌는지 윗 사진과는 달리 후덕한 표정이다. 이중 첫 번째 사진은 2016년 9월부터 발행되어 현행권으로 유통 중인 영국 5파운드 폴리머 신권 뒷면의 처칠 경 사진으로 사용되었다. [[http://www.thenewfiver.co.uk|영란은행 사이트 인증. 3D 지폐 이미지 드래그를 통해 뒷면을 확인할 수 있다.]] 2022년 8월 23일 캐나다 오타와의 페어몬트 샤토 로리에(Fairmont Château Laurier) 호텔에서 보관 중이던 위 사진이 도난(바꿔치기)당한 것이 발견되어 수사중이다.[[https://blog.naver.com/geniusjo1984/222858732873|링크]] * 우리가 알고 있는 중년의 뚱뚱한 사진만 봐서 그렇지, 젊었을 적을 보면 대단한 [[미남]]이다.[* 대표적인 예가 샌드허스트 사관학교 재학 시절 사진인데 딱 봐도 상당히 미남인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탈모]]가 너무 빨리 오는 바람에''' 얼마 안 되어 머리가 빠지기 시작해서 미남이었던 때는 순식간에 지나가버렸다.] [[https://blog.naver.com/hannamliquor/220898588352|여기]]에 청년 시절 사진이 나와 있다. 또한 처칠은 2차 대전 연합국 지도자들 중에서 젊었을 시절이 가장 잘생긴 지도자로 꼽혔었다. 참고로 2위는 [[이오시프 스탈린]]. * 윈스턴 처칠 사진을 검색해보면 그중 반 이상은 [[시가(담배)|시가]]를 물고 있거나 들고 있다. 처칠 본인도 평생동안 25만개에서 30만개에 가까운 시가를 태웠다고 스스로 이야기 할 정도로 시가에 푹 빠져 산 [[애연가]]다. 그래서인지 시가와 관련된 이야기도 제법 전해지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 90세까지 천수를 누리다 갔다. 워낙 어마어마한 양이라 그만큼 시가를 좋아했다는 의미지 진짜 30만개까지 피우지는 않았을 거라 추측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18살에 시작해서 하루에 11개 피웠다 치면 도달 가능한 숫자인 만큼, 30만개 까지는 아니라도 20만개~25만개 정도는 충분히 넘었을 법한 숫자다. 보통 시가란게 독하고 비싼 물건이라 일반 사람들은 가끔가다 주머니 사정 좋을때 한번씩, 매일 피울만큼 재력이 되는 사람들도 하루에 보통 한둘, 많으면 네다섯 이상으론 안 피는 편이지만 이 영감은 이 비싸고 독한 시가를 평생 남들이 궐련 담배 피는 것만큼 자주 폈다. 아무리 시가가 속담을 안 하고 입담을 한다고 해도, 이 정도면 폐암이 아니라 후두암이나 구강암으로 일찍 죽지 않은 게 기가 막히고 용한 정도이다.[* 처칠과 비슷하게 입에 시가를 달고 다닌 동시대 유명인으로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있다. 프로이트는 하루에 20개 이상의 시가를 피웠고, 그로 인한 구강암 진단을 받았음에도 아랑곳않고 피워댔다. 결국 30차례가 넘는 수술을 받았으나 더 이상의 치료가 의미가 없다고 여겨 주치의인 슈어 박사에게 안락사를 부탁했다. 슈어 박사는 그것에 동의해 프로이트에게 다량의 [[아편]]을 주사했고, 프로이트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다만 프로이트도 처칠만큼은 아니지만 그렇게 시가를 피우고도 83세라는 나이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 당시의 평균 수명을 고려하면 충분히 오래 산 편이다. ] *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오스만 제국]]에 인도하기로 되어있던 전함 2척[* [[HMS 애진코트]], [[HMS 에린]]]을 그냥 압류해버린다. 이유는 당장 전함이 필요하고, 오스만 제국은 독일에 붙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 결국 오스만 제국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린 탓에 [[독일]] 쪽으로 붙게 만든 주요 원인이 되었다. * 젊은 [[장교]] 시절, [[선박|배]]에 타다가 난간을 잡았는데 마침 풍랑으로 배가 흔들려 오른쪽 [[어깨]]가 [[탈구]]되는 부상을 입었다. 당시에 치료가 시원찮았는지 오른쪽 어깨의 습관성 탈구와 통증은 평생 그를 괴롭혔고, 그렇게 반불구가 됐다. 그래서인지 그는 나중에 연설을 할 때도 제스처를 주로 [[왼팔]]로 했다고 한다. 어깨의 부상 때문에 기병임에도 랜스나 세이버 같은 무기를 쓸 수 없어 당시 최신형 자동권총이었던 [[마우저 C96]]을 구매해서 썼다. [[새옹지마|그런데 냉병기를 쥘 수 없게 된 덕분에 수단에서 소속부대가 포위당해 주변 동료들이 떼로 전사하는 아수라장에서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게 된다.]][* 맥심 기관총이 맹위를 떨쳐 일방적인 학살이 일어난 것으로 회자되는 1898년 옴두르만 전투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 처칠은 21창기병 연대 소속 중위이자 종군기자(요즘으로 치면 특파원)로 참전했다. 21창기병 연대는 언덕 위에 있는 소규모 부대를 발견하고 공격했다가 그 뒤에서 대기하던 부대에 포위당해 연대원 약 400명 가운데 20여 명이 전사하고 50여 명이 부상당했으며 말은 100필이 넘게 손실되었다고 한다.] * [[미국]]이 2차 대전에 공식 참전하기 전, 미국의 협력을 얻기 위해 윈스턴 처칠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캐나다]] 뉴펀들랜드에 도착했다. 숙소에서 벌거벗고 [[샤워]]장에서 나오다가 갑작스럽게 들른 루스벨트와 마주쳤다. 당황한 루스벨트가 몸을 피하려 하자, '''"대영제국의 총리는 미합중국의 대통령께 아무것도 감추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웃었다고. 다만 이 사건의 경우 당시 처칠은 미국의 협력과 루스벨트의 신뢰를 얻어내기 위해 매우 큰 공을 들이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서, 단순한 기행이 아니라 민망한 순간에 정치적 기지를 발휘한 일종의 시의적절한 재담(才談)으로 높게 평가하는 경우도 있다. * 1920년대 [[노동자]]들의 파업 현장[* [[https://en.wikipedia.org/wiki/1926_United_Kingdom_general_strike|1926년 영국 총파업]]일 확률이 높다.]에 갔다가 분노한 노동자들에게 포위되었다. 그러자 당당히 시가 하나 빼물고 노동자들 사이를 걸어서 유유히 걸어나갔다고. 가장 인상 험악하게 생긴 노동자에게 담뱃불을 빌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 [[이오시프 스탈린]]과 전후 협상 과정. [[http://sonnet.egloos.com/3016277|참고 자료]], [[http://webcache.googleusercontent.com/search?q=cache:5v5XBKaGLPoJ:panzerbear.blogspot.com/2007/02/1944.html+&cd=1&hl=ko&ct=clnk&gl=kr|# 참고 자료 2]] >"우리는 모두 그 지역에 이해관계, 목표, 그리고 하수인들을 갖고 있습니다. '''쪼잔한 건수'''로 서로 맞서지 맙시다. 대영제국과 러시아가 관심이 있는 만큼 당신이 [[루마니아 왕국|루마니아]]의 90%를 먹고, 우리가 [[그리스 왕국|그리스]]의 90%를 먹으며, [[유고슬라비아]]는 50:50로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We have interests, missions, and agents there. Don't let us get at cross-purposes in '''small ways'''. So far as Britain and Russia are concerned, how would it do for you to have ninety percent dominance in Rumania, for us to have ninety percent of the say in Greece, and go fifty-fifty about Yugoslavia?" 여기서 빠졌지만 [[불가리아 왕국|불가리아]]는 75:25였고, 결국 80:20으로 결정이 났다. 그리고 이것이 '''각국의 운명을 결정지었다'''([[유고슬라비아]]는 다행히 [[소련]] 영향권에 들지 않고 독립을 유지했지만 나머지 나라들은...). 수 개 국가들의 존망을 '''푼돈 거래하듯''' 해버렸고 그대로 그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몰도바|소련으로 넘어간 루마니아 땅]]은 소련 붕괴 후 유럽 [[최빈국]]이 되어버렸다. 사실 애당초 유고슬라비아는 영국, 소련이 마음대로 거래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당시 티토가 이끌던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은 파르티잔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독일]], [[이탈리아]] 노획장비로 무장한 공군, 기갑부대까지 갖춘, 오랜 게릴라전으로 숙련된 80만 대군이었다. 게다가 그 지도자 [[티토]]는 자신을 암살하려 든 스탈린에게, 자꾸 암살자를 보내면 자기도 보내겠다고 경고를 날릴 정도로 겁없고 깡다구 있는 인물이었다. 물론 열강인 영국, 소련이 맘을 먹는다면 유고를 제압하고 영향권에 넣는 게 이론상으로는 가능했지만 2차대전으로 녹초가 된데다 냉전을 준비해야 하는 두 국가 입장에서 그러기는 현실적으로 너무 버거웠다. * 하루는 의회에 늦게 출근해서, 상대편 의원이 "아니, 의회에도 늦는 사람이 무슨 중대한 일을 할 수 있는가?"라고 깠는데, '''"너도 나처럼 이쁜 마누라 집에 있어봐라, 다음 날 아침에 일찍 일어날 수 있겠냐?"''' 라고 하여 주위를 웃음바다에 빠뜨린 뒤 그냥 넘어갔다고 한다. * 영국 본토 최초의 여성의원이자 미국 출신 여성 하원의원 [[https://en.wikipedia.org/wiki/Nancy_Astor,_Viscountess_Astor|낸시 애스터]]와의 설전도 유명하다. 낸시 애스터는 남편인 월도프 애스터[* 미국의 유명한 부호 가문인 [[애스터 가문]]의 후손으로 [[타이타닉]]에 탑승했다가 사망한 존 제이콥 애스터와는 사촌지간이다.] 하원의원이 자작 귀족 지위를 물려받음으로서 하원의원에서 물러났을 때, 남편이 권유해서 하원의원에 출마해서 당선되었고, '''26년간''' 하원의원으로 활동한 사람이다. 1923년 술 허용 연령대를 18세 이상으로 올리고 1928년 공무원 남녀 동등권 법안을 통과시키는 등, 많은 족적을 남겼다.[* 출처: [[세계사 산책]].][* 하지만 부정적인 면모도 많았는데 [[나치]]에 동조하는 발언을 여럿 남겼고 [[인종차별주의]] 신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나치 독일]]과 적으로 맞붙은 [[2차 세계 대전]] 당시 [[이탈리아 전선]] 장병들을 공분에 빠트린 [[릴리 마를렌#s-1.4.2.1|D-Day 기피자 발언]]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 낸시 애스터가 의회에 출석한 처칠에게 "당신이 내 남편이었다면, 당신의 찻잔에다 독을 탔을 겁니다(Sir, if you were my husband, I would poison your drink)"하고 독설을 하자, 처칠은 "부인, 당신이 내 아내였다면, (당신의 남편으로 사느니 차라리) 그 찻잔을 마셨을 거요(Madam, if you were my wife, I would drink it.)"라고 대꾸했다고 한다. 생략된 부분이 있다보니 '당신 같은 분이 타주는 독이라면 기꺼이 마시겠다'라는 해석이 퍼진 적이 있었다. 이러면 모두 궁금해 할 낸시 애스터의 외모는 아래와 같다. || [[파일:Nancy Astor_Viscountess Astor.jpg|width=100%]] || [[파일:Nancy Astor and Waldorf Astor.jpg|width=100%]] || [[파일:Nancy_Astor_Viscountess_Astor.jpg|width=100%]] || || 젊은 시절의 낸시 애스터 || 1935년의 남편과 함께 || 1949년의 낸시 애스터 || * 어느 날 여왕 [[엘리자베스 2세]] 앞에서 파티가 열렸는데 술을 많이 마신 처칠은 취해 있었다. 이 파티엔 [[영국 노동당]]의 베시 브래드록(Bessie Braddock)이라는 여성 국회의원도 참석했었다. 베시 브래드록은 [[영국 노동당]] 하원의원이자 여성, 어린이, 복지, 청소년 범죄 같은 사회적 문제에 대한 맹렬한 운동가로 "투쟁하는 베시"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이 브래드록이 처칠을 망신 주려고 처칠에게 다가가서 모두에게 들리도록 "윈스턴, 당신은 완전히 술에 취하셨군요! 게다가 한술 더해, 당신은 역겹도록 취했어요"(Winston, you are drunk, and what's more you are disgustingly drunk.)라고 외쳤다.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처칠은 "베시 부인, 당신은 못생겼어요. 게다가 한술 더해, 당신은 역겹도록 못생겼지요. 그래도 난 내일 아침이 되면 술이 깨겠지만, 당신은 여전히 역겹도록 못생긴 그 얼굴 그대로일 거요("Bessie, my dear, you are ugly, and what's more, you are disgustingly ugly. But tomorrow I shall be sober and you will still be disgustingly ugly.")"라고 대꾸했다고 한다.[* 굳이 따지자면 여왕 앞에서 취한 처칠이나, 하원의원으로서 총리를 그냥 이름으로 '윈스턴'이라고 부른 브래드록이나 둘 다 무례하게 행동한 상황이었다. 어쩌면 이 상황의 최대 피해자는 파티 잘 하고 있었는데 총리랑 하원의원이 서로 예의를 상실한 채 굴고 있어서 당황스러웠을 법한 [[엘리자베스 2세]]였을지도.] * [[팔불출]]이었는지 자기 [[사위]]를 굉장히 맘에 안 들어했다.[* 이 일화에 언급되는 사위가 처칠의 둘째딸 사라 처칠의 첫번째 남편인 빅 올리버다. 배우에 서커스 단원이어서 그랬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는 왜곡된 내용으로, 빅 올리버는 오스트리아 귀족(남작)의 아들로 원래 의학을 공부하다 클래식 음악가가 된 상류층 사람이었다. 그는 동시에 코미디언이기도 했는데, 국내에는 흔하지 않지만 해외에서는 자주 볼 수 있는, 연주 중간중간에 농담이나 장난을 쳐 사람들을 웃기는 유형으로, BBC 라디오 등에도 자주 출연했던 유명인이었다. 다만 집안이 [[유대인]] 혈통이라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접수하자 바로 해외로 망명했다. 그는 나치의 블랙북에 올려져 있을 정도로 나름 거물 인사였는데, 영국에 와서는 [[브렌트포드 FC]]의 열렬한 서포터가 되었고, 나중에 이 팀의 회장까지 된다.] 이 때문에 사위는 장인어른에게 호감도를 올리려고 처칠을 '[[파파]]'라고 부르며 [[애교]]를 많이 부렸다.[* 상술한 첫 번째 남편이라는 이야기처럼 빅 올리버는 사라 처칠과 1945년에 이혼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혼할 때는 미운정 고운정이 다 들었는지 처칠이 꽤 슬퍼했다고.] 어느날 사위가 묻기를, >사위: 파파는 어느 정치인을 가장 존경하죠? >처칠: [[베니토 무솔리니|무솔리니]]. >사위: 그 사람 [[파시즘|파시스트]]잖아요? >처칠: '''근데 지 [[갈레아초 치아노|사위]]도 총살시킨 놈'''이었거든.[* 무솔리니의 사위인 [[갈레아초 치아노]] 백작은 무솔리니가 실각할 때 가담했다가, 나치의 지원으로 복귀한 무솔리니에게 총살당했다.] * 사후이긴 하지만, 그가 2차대전 당시 연설 때 사용하던 틀니가 경매에 나왔는데 한국 기준으로 2,800만원에 달하는 가격에 낙찰됐다.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008041433211&code=115|세계를 구한 이(齒)]][* 참고로 틀니를 맞추려면 약 값 까지 약 400만원 정도 생각해야한다. 요즘엔 그나마 의료보험이 돼서 120만원 정도.] * [[시가(담배)|시가]] 같이 매우 좋아하던 기호품들에는 아주 환장을 해서, 2차대전 중에 처칠에게 보내는 물품에 대해 '독살 위험을 피하기 위한 최소한의 독검출 과정은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무시해도 좋으니 빨리 시가를 내 앞에 내놓으라!]]''''고 했다. 그래서 당시 처칠의 식품담당 검사원은 많이 고생했다. 오죽하면 [[영국 본토 항공전]] 당시 그 급박한 상황에도, 단골 가게의 주인이 폭격 후에 "수상 각하께서 항상 즐기시는 물건은 안전합니다."라고 연락해줄 지경. * 전람회에 작품을 냈다가 낙선한 화가가 어느 날 윈스턴 처칠을 만나 불평했다. 심사위원들이 작품을 제대로 볼 줄 모른다는 불평이었다. 화가는 [[네가 한 번 만들어봐라|"그림 한 장 그려본 적 없는 사람이 심사위원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처칠이 대답했다. "나는 이 나이가 되도록 달걀을 낳아본 적이 없네. 그래도 달걀이 싱싱한 것인지 상한 것인지 가려낼 능력은 있네. 평생 그림 한 장 그려본 적 없어도 심사위원을 하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말을 먼저 꺼낸 화가는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처칠이 덧붙였다. "어떤 심사위원이 보더라도 뽑힐 수 있는 그림을 그리도록 노력해보게나"라고. 사실 처칠은 전문 화가 수준의 풍경화를 그릴 정도로 뛰어난 그림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돌프 히틀러]]의 그림도 경매에서 비싸게 팔리긴 하지만, 이건 예술성이 있어서라기보다 유명한 (악명높은) 사람이 그린 것이라 그런 것인 반면 처칠의 그림은 예술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파블로 피카소|피카소]]에게 "평생 그림으로도 충분히 먹고 살 만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면 말 다했지 않은가.[* 일찍 그림을 배운 것이 아니라 늦은 마흔살에 시작해 정계활동 중에도 틈틈히 그림을 계속 그렸다고 한다.] 그래서 처칠의 그림은 여전히 경매에서 히틀러의 그림보다 더 비싸게 팔린다. 2021년에는 [[안젤리나 졸리]]가 소장하고 있던 윈스턴 처칠의 그림이 109억원에 낙찰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https://www.yna.co.kr/view/AKR20210302063500009|#]] 1943년 [[카사블랑카 회담]] 직후 [[모로코]]의 [[마라케시]]를 그린 풍경화인데,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생일 선물로 준 것이라고. 다만 인물화는 그리지 않았는데, 인물화도 그려보라는 주변의 권유에 '''"나무는 '나는 이렇게 생기지 않았다'고 불평하지 않는다"'''고 답했다고 한다.[* 미드 [[더 크라운]] 시즌1에서도 이 대사는 언급이 된다.] * 비슷하게 자동차 경연대회에 심사위원장으로 위촉된 적이 있다. 그런데 정말 멋지고 화려한 고급차가 아니고 평범한 승용차를 최우수 자동차로 뽑았다. 한 고급차 소유주가 와서 "내 차가 더 멋지지 않으냐"고 따지자 "부인, 부인의 차 보닛을 열어보니 저 차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럽더군요. 하지만 저 차는 엔진 구석구석까지 다 청소가 되어 있었습니다. 어느 차가 더 멋지겠습니까?"라고 답했다. * 종군기자 시절 [[대한제국]]의 한성에 방문해 [[손탁호텔]]에 머무른 적이 있다는 [[도시전설]]이 있지만, 손탁호텔은 1902년 만들어졌고 처칠은 1900년에 이미 하원의원이었다. * 그는 W.C를 매우 싫어했다. [[화장실]]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머릿글자가 '''W.C'''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적들이 이걸 가지고 비아냥거린 게 많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추축국]]들도 이 머릿글자를 가지고 각종 프로파간다 선전물을 만들기도 했다. 아래는 그 예시인 [[일본 제국]]의 선전물이다. || [[파일:t7834ccmwff31.jpg|width=100%]] || * 사이렌 수트(Siren suit)를 개조하여 만든 '처칠 롬퍼(Churchill Romper)'라는 옷을 유행시킨 바 있다. 자세한 것은 [[인민복#s-2.2|롬퍼]] 참조. * 2차대전 직후 등장한 영국 [[노동당(영국)|노동당]]의 [[클레멘트 애틀리|애틀리]] 내각이 대기업의 국유화를 추진하자 처칠과 보수당은 여기에 반대하면서 의회에서는 격론이 벌어졌다. 그러다 휴식시간이 되자 의원들은 화장실로 몰렸는데, 애틀리 총리의 옆 변기에 자리가 있는데도 처칠은 굳이 다른 줄을 서서 볼일을 보았다. 그러자 애틀리가 처칠에게 물었다. >애틀리: "제 옆자리가 비었는데도 다른 줄을 서셨는데, 제 옆에 있기도 싫을 정도로 제가 싫으신 겁니까?" >처칠: "아니요. 그런 건 아닙니다." >에틀리: "그럼 왜 빈 자리를 두고 굳이 줄을 서신 거죠?" >처칠: "그야 총리께선 뭐든 [[거근|큰 거]]만 보면 [[국유화]]하자고 달려들지 않소." 애틀리와 처칠의 관계는 정치적으로는 대립관계였지만, 사적으로는 서로의 장단점을 인정해주며 그럭저럭 괜찮았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게, 당장 전임 총리를 사퇴시키고 다음 총리로 처칠이 지명되기 좋은 환경을 조성해준게 애틀리였고, 처칠이 첫 전시내각을 꾸릴 때 함께 내각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바로 이어서 총리를 한 것도 애틀리였다. 게다가 애틀리 본인도 행정업무에 대한 실력있는 능력자였고. * 2차 대전 중에 처칠이 [[이라크]] 대사를 만났는데, 그때 그는 대사에게 술을 권했다고 한다. 이에 대사가 "저는 [[이슬람교]]를 믿으므로 술을 마실 수 없습니다"라고 하자 "세상에 이럴 수가. 오 [[하느님]], [[예수]]님, 아니 [[알라]]여!"라고 부르짖었다고 한다. 실제로 처칠이 생전에 위스키를 즐기는 애주가였고, [[벨즈]] 위스키를 사랑했던 처칠이 듣기에 이보다 슬픈 말이 있었을까? 사실, [[골초]] 이미지가 유명해서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위스키]]와 [[코냑]]을 매우 좋아하는 애주가라서 매일같이 즐겨마셨는데 레몬과 얼음을 넣은 [[하이볼]]을 좋아했다고 한다. 처칠은 유독 저가형 위스키를 좋아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벨즈는 존바, 블랙앤화이트 등의 위스키와 비견되는 저가형 [[위스키]]로 유명하고, [[조니 워커]] 레드 라벨 역시 벨즈보다는 가격대가 높지만 저가 위스키로 유명하다. 저가 위스키는 '알콜 부즈([[에탄올]] 특유의 향)'와 '진한 피트향'으로 유명한데, 그래서 니트[* Neat. 얼음 없이 술의 향을 느끼며 마시는 경우]에는 매우 적합하지 않으나, 하이볼이나 [[잭콕]], [[폭탄주]]를 만들어 마시면 매우 맛있고, 조니워커 레드 라벨과 [[콜라]]의 궁합은 애주가들 사이에서 '고소함과 달콤함'으로 매우 유명하다. 처칠이 하이볼을 좋아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오히려 저가 위스키가 입맛에 맞았을 수 있다. * 처칠이 연설 문제로 [[택시]]를 타려고 했더니 [[택시 기사]]가 승차를 거부했다. 불쾌해진 처칠이 이유를 묻자, 기사는 "이제 곧 처칠 총리의 라디오 연설이 있어서요. 그걸 들으려고 하거든요."라고 답했다. 처칠은 기분이 좋아져서 1[[파운드]]를 그냥 건네줬는데, 기사가 힘껏 소리쳤다. "손님, 그냥 타세요. 처칠인지 뭔 놈인지 몰라도 역시 돈이 먼저네요." 이미 준 돈을 돌려달라고 할 수도 없고, 그 꼴로 우거지상이 된 처칠은 그 택시를 타고 의회에서 내리면서 택시기사에게 "라디오만 듣지 말고 처칠 얼굴이나 좀 알아두시오!"라고 불쾌하게 소리쳤다고 한다. * 세계적인 극작가였던 [[버나드 쇼]]가 처칠에게 연극표 2장을 건네며 "제 연극에 초대합니다. 혹시라도 동행하실 친구 분이 계시다면 함께 오십시오."라고 말했다. 이에 처칠은 "첫날은 바쁜 사정으로 어려우니 다음 날 가지요. 연극이 하루만에 끝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라고 응수했다. 해석하자면, 쇼는 처칠에게 '당신은 동행할 친구조차 하나 없는 외톨이 아닙니까?' 라고 비꼰 것이고, 처칠은 '그러는 당신은 첫 공연 올리자마자 망할 형편없는 글쟁이 아니오?' 라고 받아친 것[* 이 일화를 이야기할때는 보통 본문 내용처럼 일일히 풀어서 설명하지 않고, "제 연극에 초대합니다. 친구분과 함께 오시지요. '''만약 있다면요'''." 라는 비아냥에 "첫 날 공연은 바쁜 사정으로 어려우니 다음날 공연에 가지요. '''만약 있다면요'''." 라고 응수했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다만 [[버나드 쇼]] 문서에 따르면, 이 일화가 처음 알려졌을 때 주인공들은 버나드 쇼와 처칠이 아니라, 처칠의 아들인 란돌프 처칠과 노엘 카워드(Noel Coward)였다고 하니 실화인지는 불분명하다. * 2차대전 말기, 독일이 패전 직전까지 내몰리며 [[대서양 전투]]가 끝나가고 해군력에 여유가 생기자, 처칠은 일본에 아시아 함대가 탈탈 털리고 [[홍콩]]과 [[싱가포르]]를 손쉽게 내주며 무너진 [[대영제국]]의 자존심을 찾기 위해 [[태평양]]에 해군 함대를 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4년 내내 홀로 일본과 싸운 [[미 해군]] 태평양 함대 입장에선 다 된 밥에 숟가락만 얹히려는 꼴이라 눈총을 받았고 [[어니스트 킹]]을 중심으로 극렬한 반대를 받았다.[* 미군이 사실상 혼자 싸웠던 문제도 있지만, 급한 상황에서 항모 좀 빌려달랬더니 영국이 거부했던 전적도 한 몫 했다. 결국 어떻게든 빌려주기는 하는데, 이미 한 숨 돌린 상황이었기 때문에 얼마 안 있어 그냥 돌려주게 된다. 물론 당시 영국도 쉬운 상황은 아니었고, 전쟁 초장부터 [[말레이 해전]] 등에서 처참하게 깨지면서 [[인도]]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젖어있었다는 변명은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연합군 수뇌부가 모여 앞으로의 전쟁 수행계획을 논의할 때 이 문제가 거론되었다. 킹 제독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영국 함대의 파견을 거부하고 있었는데, 처칠이 갑자기 다짜고짜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대통령 각하! 영국 함대를 태평양으로 보내고자 하는데 찬성하시지요?"라고 몰아붙였고, 루스벨트가 그 자리에서 OK! 해버림으로서 [[영국 해군]]은 태평양에 파견될 수 있었다. * 처칠은 [[노벨문학상]]을 받은 것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글에 상당히 민감했다. 본래 [[종군기자]] 출신이었던 처칠은 문법규칙에 까다로웠고,[* 학창 시절의 영향도 무시 못했는데, 성적이 좋은 당시 상류층 동급생들은 [[영어]]는 적당히 배우고 [[그리스어]]나 [[라틴어]]를 배웠지만, 처칠은 늘 영어만 배웠다고 한다. 이러다보니 문법규칙에 숙달됐다.] 자기 글에 편집자들이 손대는 꼴을 못 봤다. 앞에서 언급된 명언들은 대부분 연설문에 포함되어 있는데, 처칠은 이 연설문을 완성하기 위해서 몇 주나 투자하면서 교정을 봤다. 그래서 어느 편집자가 처칠의 문장에서 [[전치사]]로 끝나는 부분을 발견하고는 바꿔놓은 적이 있었다. 이에 대해서 처칠은 그 즉시 'This is the kind of impertinence '''up with''' which I shall not '''put'''.'이라는 항의서한을 보내 질책했다고 한다. 가끔 '''전'''치사('''pre'''position)의 의미를 과잉해석하여 전치사로 문장을 끝내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일례로 Where are you from?을 From where are you?로 바꾼다든지.], 이것을 희화화하는 문장을 답신으로 보냈다. 설명하자면 원래 문장은 '(생략) impertinence which I shall not '''put up with'''.'(참을 수 없는 무례)인데 여기서 억지로 전치사 2개(up with)를 통째로 which 앞로 보내서 '~ ''up with'' which ~' 를 만들었다. 전치사 2개를 통째로 관계대명사 앞으로 보내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에, 영어권 화자에게는 상당히 어색하게 들린다. 이는 내용상으로 편집자를 디스하는 동시에, 문장 구조적으로 무조건 문장 말미의 전치사를 제거하는 게 [[과도교정|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 그리고 이와 관련해서 전쟁 중에 정보국장이 단어 하나 잘못 사용했다고 해서 지적한 사례가 존재하는데, 사실 이건 지적할 만한 사례였다. 왜냐하면 문제의 단어가 'intense'를 사용할 자리에 'intensive'를 사용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intense는 원래 크거나 강대하고 혹독하다는 의미이고, intensive는 작정해서 끌어모아서 세졌다는 의미이다. 어느 지역의 적 부대가 intense하면 강병이 배치되어 있다는 거고, intensive하면 적이 병력을 집중시켰다는 의미가 되어서 전시 기준으로는 의미가 천양지차이다. 군 정보국장이 이런 식으로 단어 섞어쓰면 까이는 게 당연하다. 이와 비슷한 사례를 들자면 [[발라클라바 전투]]가 있겠다. * [[고양이]]를 무척 좋아했기에 처칠과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도 많다. 오래 살았고 집도 부유한 편이라서 여러 마리를 키웠는데 [[넬슨]],[* 이 고양이는 처칠 1차 집권기의 [[총리관저 수석수렵보좌관]]이기도 했다.] [[캣]](이 고양인 이름을 안 지어줘서 그냥 캣으로 부름), [[벤저민]], [[스튜어트]] 같은 이름을 지어주면서 모두 아꼈다. 늘그막에도 [[조크]]라는 고양이를 아꼈는데 죽기 얼마 전 찍은 사진에 같이 나온 고양이가 바로 조크이다. 조크는 처칠이 죽은 뒤에 처칠 유족들이 키우면서 1974년까지 살았는데, 지금도 조크의 후손들이 조크 2, 3, 4세로 불리면서 계속 처칠의 집에서 대를 이어 살고 있다고 한다. * 윈스턴 처칠 총리가 전용차를 타고 [[영국 국회의사당]]을 향해 가고 있었다. 교통은 막히고 회의시간은 임박했다. 처칠은 마음이 조급해져서 운전사를 재촉했다. "여보게, 회의에 늦겠는데, 좀 더 빨리 달릴 수 없겠나?" "예. 저도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요." 운전사도 마음이 급해졌다. 순간 [[교통경찰]]이 처칠이 탄 차를 정지시켰다. 다급한 나머지 운전사가 신호를 위반하고 달렸기 때문이다. 교통경찰이 딱지를 떼려 하자 운전사가 "지금 이 차에는 총리 각하가 타고 계시다네. 회의시간이 임박해서 그러니, 어서 보내주게나!"라고 말했다. 그러자 교통경찰은 '''"총리와 비슷하기는 하지만, 법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 봐서는 총리와 비슷하지는 않군요.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이 나라의 법질서를 책임지고 있는 총리의 차가 교통신호를 어겼을 리가 없습니다. 게다가 총리의 이름을 함부로 들먹이다니, 당신에게는 위증죄까지 추가해야겠군요. 그리고 아무리 총리가 타고 있는 차라고 해도, 교통신호를 위반했다면 당연히 딱지를 떼어야 합니다. 그 누구도 예외는 있을 수 없습니다. 어서 면허증을 내놓고, 내일 당장 경찰서로 출두하시오!"''' 그렇게 운전사는 교통신호 위반딱지를 떼였으나, 처칠은 기분이 너무도 좋았다. 저런 꿋꿋한 경찰관이 영국의 [[민주주의]]를 지켜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처칠은 런던 경시청장에게 유쾌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었다. '''"경시청장인가? 나 처칠인데, 오늘 이러저러한 일이 있었으니, 그 모범적인 교통경찰을 1계급 특진시켜 주게나!"''' 수화기를 통해 전해들은 런던 경시청장의 대답은 '''"죄송합니다, 총리 각하. 런던 경시청의 내규에는 '교통법규를 위반한 사람에게 딱지를 뗀 교통경찰을 1계급 특진시켜 주라'는 조항은 없습니다"'''라는 것이었다. 처칠은 그날 런던의 경찰들에게 2번 당했지만, 자신이 [[영국 총리]]임이 한없이 자랑스러웠다. 이내용은 처칠 말고 다른 사람으로 나오는 버젼도 많다. * 당시 있는 집 사람들은 아이를 [[유모]]에게 맡겨 기르게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때문에 자식들은 친부모보다 유모를 더 가깝게 느끼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다. 처칠 역시 물리적인 거리가 매우 멀었던 친어머니보다는 20대 시절까지 곁에 지내면서 자신을 보필해준 유모 엘리자베스 에버레스트([[https://en.wikipedia.org/wiki/Elizabeth_Everest|Elizabeth Everest]])를 어머니처럼 사랑하며 따랐다. 그래서 친어머니의 죽음보다 유모의 죽음에 더 큰 충격을 받았으며, 이후 오랫동안 사비를 털어 유모의 무덤을 관리했다고 전해진다. 엘리자베스는 처칠의 남동생 잭도 돌봤다. * 전후 "2차대전 승리의 원인에 어떤 것이 있냐"는 질문에 [[앨런 튜링]]을 지목하기도 했다.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에도 나오는 일화지만, 당시 암호병학교에서 이니그마 해독방식의 견해가 달라 동료들과 융합되지 못하던 앨런 튜링에게 편지를 받은 뒤, 그를 팀장으로 지목해 해독연구를 지원해주었다. 근데 네이버 캐스트에 의하면 자서전엔 튜링에 대해서 언급도 안 했다고 한다. 말년 불우했던 앨런 튜링의 행적 때문인 듯하다. 자세한 사항은 문서 참고. *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 처칠은 상륙부대와 함께 작전에 참가하려 했다. 주위 사람들이 "일국의 총리가 전선에 뛰어드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며 만류하려 했지만, 처칠은 고집을 꺾으려 들지 않았다. 결국 처칠의 고집을 꺾은 사람이 나타났는데 국왕인 [[조지 6세]]였다. 그런데 고집을 꺾은 방법이란 게 기상천외하다. "처칠 총리가 상륙전에 참가하겠다는데, 대신 짐이 국왕으로서 상륙하겠소. 공격 당일 가장 먼저 상륙하는 부대의 장병들과 짐이 함께할 것이오."라고 말해버렸다. 처칠이 말도 안 된다며 만류하자 '''"짐이 전사하면 [[엘리자베스 2세|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있지만, 처칠 총리는 그렇지 못하오."'''라고 말한다. 결국 처칠은 상륙전 참가를 없던 일로 했다는 이야기다. *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만들어진 [[파웰과 프레스버거]]의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라는 영화를 싫어했다. 원래 이 영화는 처칠 세대의 군인들을 희화화하고 있는 만화를 원작으로 삼고 있어서 처칠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는데[*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Colonel_Blimp_cartoon.png]] 딱 우스꽝스러운 포즈로 '내가 젊었을 땐 말이야' 하는 [[꼰대]] 군인들을 풍자하는 내용이었다.], 영화판 내용도 단순한 선전 영화가 아니여서 '자랑스러운 [[영국군]]을 희화화하고 [[독일군]]을 미화하는 영화'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결국 처칠은 부하를 시켜서 영화 제작을 중단시키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덕분에 영화 촬영이 꽤 힘겨웠다고 한다.] 개봉 연기하는 것으로 마무리지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는 훗날 영화 평론가들에게 최고의 [[영국 영화]]로 꼽힌다. * [[미국]]에 갔을 때 교통사고를 당한 적이 있다. 도로를 건너야 되어서 습관대로 [[좌측통행|오른쪽]]에서 차가 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건넜지만 안타깝게도 미국은 [[우측통행]] 국가였다. 크게 다친 처칠은 미국에서 몇 개월 입원해야 됐는데 당시 미국은 [[금주법]]을 시행하던 시절이라 그의 필수품인 술을 마실 수가 없었다. 하지만 금주법조차도 애주가인 그의 의지를 꺾지 못했던지라, 의료용으로 사용하는 위스키를 처방받는 [[편법]]으로 술을 마셨다고 한다. 위에 언급된 [[대체역사물]] 설정집 [[만약에|what if]]에 첨부된 설정 중 이 교통사고로 처칠이 죽는 바람에 후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이 패한다는 설정이 있다. * 처칠의 자서전 '폭풍의 한가운데'에도 나오는 일화다. 1911년.시내 한복판에서 시드니가 총격사건이 벌어졌다. 당시는 아직 1차 세계대전도 일어나기 전이라 이런 총격사건은 매우 드문 일이었고, 이에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러 주변에서 서성거렸다. 사건 자체도 군 병력이 대포를 가지고 출동하기도 하는등 상당히 규모가 컸다. 당시 내무대신이었던 처칠도 일행과 함께 사건 구경을 했는데, 당시 출동 인력들에게 지시를 하는 등 직접 참견도 했다. 이때 경찰들 무리 사이에서 구경하는 장면이 사진으로 찍혔다. 이로 인해 사건 이후 많은 비난을 받았다. 책에도 적혀있지만, 가장 인상깊게 남은 비난은 '사진기자가 거기 있는 건 알겠는데, 거기에 내무대신은 왜 있냐?'는 것이었다. * 윗 문단에 적혀있다시피 영국의 전시지도자로서 불후의 명언들을 다수 남긴 바 있지만, 정작 그 명언들을 말할 때의 발음은 많이 좋지 못했고 상당히 굴려서 말하는 편이었다. 2021년 하반기 들어서는 윗 문단의 “그거이패하에정부으겨리.(IwbnfouevcmsiehwvudbqvGovernment.) ”[*해석 그것은 폐하의 정부(영국정부)의 결의이다(That is a resolve of his majesty's government).]같은 ~~주옥같은~~ 명언들이 발굴되어 밈으로 유행할 정도. * 자신의 경호원인 톰슨 경위와 다우닝가 10번지로 걸어가는데 앞에서 가던 신문팔이 소년이 휘파람을 불자 평소 휘파람에 대해 굉장한 불쾌감을 가지고 있던 처칠은[* 히틀러와 자신의 공통점이 휘파람을 싫어하는 것이라고 햇을 정도.] 소년과 가까워지자 대뜸 "휘파람 불지 말라"고 호통을 쳤다. 이에 소년이 왜냐고 묻자 "내가 싫어하니까"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했다고. 하지만 이에 쫄지 않은 소년이 '''"그럼 귀를 막으면 되잖아요?"'''라고 받아친 후 사라지자 처칠의 얼굴은 금새 분노로 빨개졌지만 곧 소년이 한 말을 따라하며 크게 웃어제꼈다고 한다. * 어린 시절에 몸이 굉장히 허약했으며 그 후에도 지병으로 고생한데다 시가 없이는 못 견디는 굉장한 애연가였음에도 90대까지 살았다. 21세기에도 남자의 평균 수명이 80세를 넘을까말까인 판에 그 당시로써는 굉장히 오래 산 것으로, 관리만 잘 했으면 그 옛날에 100세 가까이 살았을지도 모를 굉장한 장수인이다. 그 때문에 담배회사들에게는 본의 아니게 힘이 되었다고 한다. * [[올리버 크롬웰]]을 꽤 존경했다고 한다. * 새 [[파운드 스털링]] 5파운드 지폐의 인물이다. * [[드라큘라]]의 작가 [[브램 스토커]]와 [[https://www.bramstokerestate.com/interview-with-winston-churchill|인터뷰한]] 적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